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종(고려 제10대) (문단 편집) ==== 외치 ==== 왕위에 오른 정종은 임기 초에는 선대 왕인 [[덕종(고려)|덕종]]의 대 [[거란]] 강경 [[외교]]를 계승해나간다. 1035년 5월 거란이 3가지 요구를 해왔는데 1. 너희 형이 우리랑 단교한거 다시 시작해라. 2. 장성 쌓지 마라. (덕종이 쌓기 시작한 성으로 원문은 석성(石城)이라고 지칭했다. 거란 입장에서는 저런 기다란 석성이 쌓여지면 위협적이니 싫어했다.) 3. 이상 조건 안지키면 전쟁이다. 이에 대해 1035년 6월 정종이 답변했고 내용은: 1. 사신 보낼거 다 보내고 있는데 뭘 더 보내냐. 2. 성은 우리 일이니 참견하지 말고 우리가 보낸 사신 6명 억류한거나 돌려 보내라. 3. 협박하냐? 웃기는 소리하지 마라.[* 원문은 '사보희언'(似涉戱言). "마치 흘러가는듯한 우스운 발언"이란 뜻이다.] 거란의 [[전쟁]] 협박에 정종은 물러서지 않았고,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1035년 서북로에 장성을 쌓고 군사들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사기를 진작시키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을 썼다. 실제 1037년 10월 거란이 수군을 동원해 [[압록강]]을 침범하여 공격했지만 고려 정부는 자신감을 내비쳤고, 결국 거란의 침입은 아무 성과도 없이 끝나게 되었다. 이후 거란측에서 장성에 대한 언급을 포기하자 1037년 12월 정종도 외교력을 발휘해 거란과의 국교를 다시 정상화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한다. 다만 국방정책은 유지해 1044년 [[천리장성]]을 완성시켰으며, [[예성강]]의 병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힘을 기울였다. 당대 강대국으로 자리잡은 거란의 [[요나라]]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강국으로 고려가 인식되자 이후 고려는 신봉루(神鳳樓)에서 사면령을 내렸다. 신봉루는 고려 황성 정문 광화문, 궁성 정문 승평문 다음의 문이다. 신봉문은 이중루였으며 위 누각을 신봉루라 하였다. 《고려사》나 《[[고려도경]]》이 기록한 가장 화려한 누각이었으며 누각 남쪽에는 넓은 광장이 있어, 고려 국왕이 사열식, 팔관회, 사면령, 과거 등을 실시했다. 신봉루의 간판은 붉은색 바탕에 황금색 글자를 새겨 천자국으로서의 위용을 펼쳤다. 그리고 동·서번 [[여진]] 제국(諸國) 및 [[제주도|탐라]], [[왜]] 등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막강한 위상을 뽐내기 시작하는데 이런 고려의 관례가 정종때부터 시작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